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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은혜의 말씀

제목
2016년 1월31일 설교예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2/02

제목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말씀 : 베드로 후서 3:8-13
설교 : 김원동 목사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미래학은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견해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또 하나의 견해는,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미래를 낙관적인 견해로 보는 사람들은 미래 사회가 과학적으로 점점 발전해서, 삶의 여러 가지 여건이 계속 좋아질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주로 환경중심으로 봅니다. 지금 지구의 온난화 때문에 북극에 얼음의 두께가 점점 얇아지고, 사라진다고 그러지요. 또 이로 인하여 해수면의 높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 곳은, 육지가 바다에 잠길 수가 있다고 합니다. 또 생태계의 파괴로, 인간 역시 생존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이 될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두 가지 견해가, 다 일리(一理)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학이 말하는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보는 미래입니다. 성경은, 미래에 어떠한 환경, 혹은 어떤 여건이 될 것인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살 사람의 사람됨이 어떠냐'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인류의 역사는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퇴보할 것인가? 하는 글에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은 병적인 사회, 건강치 못한 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건강치 못한 사회는,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마음속에 적의(敵意)가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대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기적인 경쟁 체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웃을 협력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상대(相對)를 적으로 보고,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이겨야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게 건강치 못한 사회의 특징(特徵)입니다.  둘째는 불신(不信)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핸드폰에 가족 찾기라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남편이 지금 어디있는지, 부인이 어디 있는지 서로 그 위치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서로 믿지 못하기에, 가족 찾기 서비스 고객이 얼마나 계속 늘고 있는지 모릅니다. 건강치 못한 사회는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不信)이 팽배합니다. 셋째는, 상대방을 수단화, 도구화합니다.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고 사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을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상대방을 이용(利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수단화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어가고 있을까요?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말씀에 보면, 아담이 범죄, 타락했을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일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그랬습니다. 또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지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아무리 땀을 흘리며 땅을 갈아도, 농사를 해도 소출이 없습니다. 효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결국 땅의 문제는 뭡니까? 사람의 사람됨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됨의 문제는 뭡니까? 결국 죄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문제는 뭘까요? 한 개인의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될 때에 내 영이 건강한 영이 되고, 내 영이 건강할 때에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대인들의 정신질환을 치유하는데 있어서 완치되었다는 판정하기가 참 어렵다고 합니다. 이제 다 나았는가 해서 퇴원조치를 하게 되면, 금방 악화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서 완치 판정을 하는 룰(rule)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방을 하얗게 칠한 방을 만들고, 거기에다 수도꼭지를 설치 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틀어놓고, 구석에는 걸레 하나를 두었습니다. 이젠 다 나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환자를 마지막 최종 판단을 위해서 그 방에 넣어줍니다. 그런데 흘러 나오는 물을, 열심히 걸레로 닦아서 밖으로 내 버리는 환자는, 아직 완전치 못하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 입원을 해서 치료를 해야 하는 대상자입니다. 그러나 수도꼭지를 먼저 잠그고 방바닥의 물을 닦아내는 환자는, 이틀 동안 관찰하다가 완치로 판단해서 퇴원을 시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결과(結果)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원인(原因)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있어야 건강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제도에 매달려 있고, 법에 매달려 있고, 교육에 매달려 있습니다. ‘법이 엄정하면,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제도가 완벽하면, 이상적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좋은 교육을 시행하면, 좋은 사람으로 양육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結果)에 매달린 소치입니다. 인간사의 원인은 바로 사람의 영적 질환에 있습니다. 내 영혼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그러나 우리 영혼의 문제를 도외시(度外視)하고, 현상적이고, 결과적인 것으로 안달하는 사람은, 결코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 인간사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바르게 회복하려면, 근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안잖아요? 현대인들은 ‘자신이 참 교만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교만 중에 몇 가지를 들면, 우선 현대인들은, 지성적 교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지성적 교만은, 과학을 우상(偶像)으로 삼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가면 갈수록 과학의 산물인 컴퓨터의 결과를 믿고, 컴퓨터에 종속되어갑니다. 예를 들면,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자기가 인식하면 아예 믿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자기 지성적 교만이 있습니다. 또, 교만 중에 도덕적 교만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사람을 교육만 시켜도 온전한 인간으로 길러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 듀이 이후에 이러한 교육 사상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학교 교실에서 같은 동급생끼리 기분나쁘다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 없는 교육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게 아닙니다. 또, 권력적 교만이 있습니다. 권력만 잡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고대 권력의 상징은(?), 이집트의 바로 왕입니다. 성경은, 바로(파라오)의 심령이 강퍅했다고 했습니다. 바로의 강퍅함은, 결국 열 가지 하나님의 재앙을 끌어드리는 결과를 낳았잖아요. 또, 종교적 교만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나 내가 열심히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하면, 매사가 잘될 것이다라고 믿는 겁니다. 이런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종교적 교만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그러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럽니다. 


경건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디모데 전서 4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라는 말은, 실체가 없는 허황된 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그 무엇은, 실체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 신화입니다. 여기, ‘허탄하다’는 헬라어 단어는 바로 ‘무가치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외의 다른 것들은 결국 무가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런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경건에 이르는데 참 훌륭한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1장 26절-27절에 이런 말씀도 있지요?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 사도는 세 가지로 실제적인 경건의 척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혀를 조심하는 것"이 경건의 척도임을 말해줍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하면, 정말 원망스런 하나님으로 너희에게 나타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말조심해야 합니다. 참된 경건은 말조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141편에서 이런 고백을 했지요?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간구했지요. 그리고 둘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 경건의 척도임을 말해줍니다. 고아와 과부는 옛날에 무방비로 노출된 약자(弱者)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노예로 끌려갑니다. 그래서 그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게 하지 않는 것"이 경건의 척도입니다. 여기 ‘세속에 물들게 하지 말라’는 말은,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살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경건입니다.


여러분! 경건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가지십시다. 경건은 지식이 아닙니다. 감상도, 의식도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식의 모범적 신앙행위와 외적인 신앙활동도 아닙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겸손하게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즉 경건이란 우리의 삶에서 실존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의 사역을 닮아가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삶을 배우고자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베드로 후서 3장 8절-9절을 보십시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러분, 교회 절기 가운데 대강절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대강절은, 말 그대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을 라틴어로는 어드벤츄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오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적 ‘오심’ 즉 주님의 초림을 기억하면서, 현재적 ‘오심’ 즉 주님이 내 속에 성령으로 임재 하심을 감사하면서, 미래적 ‘오심’ 즉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준비하는 기간이 바로 대강절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再臨)을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주께서 이같은 약속을 하셨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틀림없이 오실 것입니다. 아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겠다고, 초림을 456회나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주님은 처녀의 몸을 빌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경에, 재림(再臨)에 대한 약속은 얼마나 있을까요?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구약에 1200회, 신약에 318회, 그러니까 1518회나 재림(再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오신다고 약속하셨으니 틀림없이 오실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었기에, 그 재림의 약속을 붙들고, 소망 가운데, 초대 교회 교인들은 그 삶의 모진 고난들을 다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재림의 때가 언제냐?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림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재림 하신다는 것만 틀림없으면, 언제 오실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재림(再臨)을 기다린다고 할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기다린다는 것은, 만남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제일 먼저 무엇을 합니까? 가장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준비는, 깨끗하게 목욕하고, 깨끗한 의복을 입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것입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나는 정결한가’를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요? 초림의 주님은, 구원하러 오셨으나, 재림의 주님은, 심판하러 오시거든요. 그렇다면 재림하실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罪)를 용서 받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회개(悔改)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러분, 주님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십니까?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더딘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신랑이 자기들 예상보다 늦게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신랑이 와서 보니, 다섯명의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였으나, 다섯명은, 등만 가지고 그 등에 기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는 잔칫집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신랑이 더디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그 기다린 시간은 무엇입니까? 자기 등에 기름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는 준비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지요.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 ‘주께서 제 발을 씻기시다니요. 못 씻기십니다.’ 그랬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느니라’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여! 그렇다면 내 발뿐 아니라 내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그때 주님께서 ‘이미 목욕한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에 가롯 유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최후의 만찬을 먹었으나, 그러나 가롯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목욕한 사람이 발을 씻고 깨끗해진 것처럼 목욕하지 않아도 발만 씻으면 목욕한 자와 같이 깨끗하여지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목욕한 자인가? 이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참회의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발을 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것들은 발을 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목욕하는 것과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삶 전체, 전체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이 세상적인 삶에서, 하나님 나라(천국)을 위한 삶으로, 내 자신의 의(義)로 사는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義)를 의지하는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오실 때, 우린 점도 없고, 흠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점도, 흠도 없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점도, 흠도 없이 서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힘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설교를 듣고, ‘그래, 이제 내가 더 정직하게 살아야겠다, 이제부터 좀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겠다.’ 그렇게 결심하시면 설교의 point를 놓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 메시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의를 입는 삶이, 말씀의 의를 입는 삶이 우리의 기본 경건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언약)의 의(義) 속에는 죄사함의 유효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의 의를 입기 위해 나아가는 자는 죄사함과 성령의 기름이 준비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했잖아요. 회개를 통한 죄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은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 대개 선물(膳物)을 준비합니다. 정말 사랑하면 그냥 갈 수 없는 마음이 바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12절 보세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여기, 간절히 사모하라 했는데, 이 사모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퓨도입니다. 이 ‘스퓨도’라 하는 것은, 재촉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그런 마음입니다.


여러분, 연인(戀人)을 정말 사모한다면 어떻겠어요?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 올라서 견딜 수 없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려면 최소한 우리 마음이 주님께 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습니다. 재림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보다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초림 때처럼, 주님의 재림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18-20절(마지막 명령)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마지막까지 준비해야 할 일은?
① 우리는 가야 합니다.(너희는 가서....)
②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주 동사)
③ 세례를 베풀고(옛사람에 대하여 죽고, 새사람의 법으로 살아가도록 해야지요.)
④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키 워드는, 주의 제자 삼아라는 것입니다.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가라는 겁니다.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신실한 충신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내일로 미루는 못된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 편지도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읽기’로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 밤에 왕은 암살 당했습니다. 그 편지는 오늘 밤에 자객이 왕을 암살하려고 하니 조심하라는 신하의 편지였습니다. 주님 재림하시면 더 이상 전도(傳道)할 수도 없습니다. 선물을 준비하려거든, 주님이 오시기 전(前)에 준비하십시오. 주님 오시는 그 순간에 여러분 혼자 주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부모도, 자식도 버려두고, 혼자 주님을 맞이 하시겠습니까? 주님 오실 그때 기쁨으로 온 가족이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로 초림의 그 주님이,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분명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두 아이와 함께 지하 단칸방에서 월세로 삽니다. 참 살기 힘이 들어도, 얼굴에 그늘진 곳이 없습니다. 얼마나 밝고 명랑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그 집에 심방가서 위로를 했습니다. ‘여러가지로 힘드시죠.’ 그러니 ‘아니오, 목사님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제 남편은 지금 유학 중이니, 이제 공부 마치고 곧 돌아올 것입니다. 남편이 돌아오면 다 함께 모여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을 생각하면 기운이 납니다. 남편이 돌아오면 내가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키웠는지 보여 줄 거예요. 그래서 자식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힘을 다하여 노력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의 모습이, 바로 이 여인과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우리의 삶이 지금은 힘들어도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고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 주님 앞에서 많은 영혼의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 전도와 양육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이 세상이 언제 종말(終末)이 오든지, 주님이 언제 재림(再臨)하시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목적 있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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