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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은혜의 말씀

제목
2016년 4월 3일 주일설교말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4/04
첨부파일
pinterest-matt-5_8.jpg

제목 :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말씀 : 마태복음 5:8
설교 : 김원동 목사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인류 최초로 로켓을 타고, 대기권 밖을 비행했던 사람은 구(舊)소련의 유리 가가린이었습니다. 그는 우주로 날아가,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지구의 푸른 모습을, 처음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소위 기독교의 신앙을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나라에 다녀왔던 미국(美國)의 어윈 대령이 헝가리의 어느 대학에 가서 달나라 탐험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한 학생이 질문하기를 "소련의 우주인들은 달나라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은 안보이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우주계에 나가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을 찬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질문했습니다. 그 때 어윈 대령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성경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여러분
본다는 것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는 관점(觀點)에 따라,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어느 날 피카소가 집 주위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맑은 날씨를 음미하면서 걷고 있었는데, 그 때 주위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색다른 사물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습니다. 피카소가 발견한 것은, 낡은 자전거 한 대였습니다. 낡아서 못쓰게 된 것을, 누가 버리고 간 것입니다. 피카소는 그 자전거를 잠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피카소는 그 자전거를 집으로 가져와, 안장과 운전대를 떼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용접기로 용접하여, 어울리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래서 쓸모없이 버려진 자전거의 안장이 피카소에 의해서 황소의 머리로 둔갑해 ‘유명한 작품’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피카소에 의해 만들어진 위대한 작품은,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보는 각도를 조금 달리하여 아주 특별하고 독창적인 작품이 된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보는 각도를 조금 달리하고, 자신의 재능을 조금만 부여하면 아주 특별하고 놀라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참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러분
우리가 계속해서 팔복(八福)에 대해서 살펴 보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리고 오늘 말씀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팔복을 가만히 살펴보면, 처음 네 가지 복과 그 다음 네 가지 복이 서로 밀접한 연관성(聯關性)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 결과(結果)로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애통하는 자는 그 결과로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됩니다.


온유한 자는 그 결과로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위의 세 가지 조건(條件), 즉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함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 결과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팔복의 가장 마지막 귀결점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해서 살펴보십시다.


기독교가 말하는 중심주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음, 그 심령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가장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마음이요, 그 영혼의 상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교리이해나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 마음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기독교는 본래, 행위나 외면적 태도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네 마음의 상태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즉 지, 정, 의를 포함한 전인적인 인격의 중심을 말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삶에 있어서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마음에서 비롯되어 집니다.


(예레미야 17:9절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그랬지요.

예수님도 (마가복음 7:21절에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라 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데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이런 악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면, 교육만으로, 즉 지성을 개발(開發)시키는 것으로, 그게 가능할까요? 단순한 지적 진보를 추구하는 교육으로 사람을 바르게 인도할 수 없습니다. 또, 환경을 개선(改善)시켜 주면, 인간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회 비행 청소년의 모든 문제는 성장과정의 환경적인 요인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럽니다. 그래서 그 환경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리가 있으나, 그러나 그것도 옳은 답은 아닙니다. 


오래 전에 뉴욕에서 아주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뉴욕에 중앙공원이 있는데, 모든 뉴욕 시민들의 휴식처였습니다. 그 공원이 워낙 커서, 공원의 중간 이남 쪽에는 아주 비싼 아파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원의 북쪽은, 할렘가와 맞닿아 있습니다. 흑인들이 와서, 가끔 범죄하는 곳이 이 Central Park(중앙공원)입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뉴욕의 직장인들이 조깅(jogging)을 합니다. 평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조깅을 하는데 날이 어두워지거나, 혼자 하게 되면, 상당히 위험한 지역이 됩니다. 그런데 여자 은행원 한 사람이, 날이 좀 어스름 해지는데 조깅을 하다가, 한적한 곳에서 흑인 청소년들에게 붙들렸습니다. 한 20명쯤 되는 흑인 청소년들에게 붙들려, 숲속에 끌려가서, 아주 심하게 성폭행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그들이 돌로 이 여자를 쳐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되었다가 발견됐습니다. 이게 아주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처참한 일이, 뉴욕 시내 한 가운데에서 있을 수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온 경찰력을 동원해서, 결국 범인들을 잡았습니다. 흑인 청소년들, 한 15세 전후되는 아이들 20여명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붙잡아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그들의 말이 “우리는 단지 좀 거칠게 놀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뉴욕의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는데, 그 밑에 심리학자들의 말이 나왔습니다. “이건 그들의 책임이 아니고, 우리 전체 사회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 전체 사회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고, 그렇게 주변 환경을 만들어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좋은 환경이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낙원, 즉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사람이 최초로 죄악을 향해 간 곳이, 가장 완전한 환경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온전한 환경에 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언제나 마음에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많은 문제는, 마음에서 비롯되어 집니다. 인간의 마음이, 악에 물들어 있고 거짓으로, 죄(罪)로, 부패 타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청결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로스’인데 신구약 성경에 28회나 나오는 단어로써,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청결’이라고 하면, 어떤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까?


 
먼저, 바리새적인 청결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종교적인 거룩한 행위, 즉 종교적 예식과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청결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루에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어떻게 하고, 예배는 어떻게 보고 하는 등의 형식주의적 청결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청결에 치우치게 되면, 내적 청결은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청결을 언급할 때, 그 마음의 내적인 문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 청결을 생각할 때, 엣세네파적인 청결이 있습니다.

세상을 포기하고, 은둔생활을 하며, 금욕주의를 주장해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체(一體)를 떠나, 명상과 기도와 금욕하는 생활을 청결의 최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자기와의 싸움’에서 실패하고, 더 무서운 허무주의로 치닫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문제는 은둔으로, 금욕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청결이란 첫째, 무(無)를 뜻하지 않습니다. 즉 없는 것, 빈 것, 비운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아이 마음같이 깨끗하고 단순한, 하나의 마음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청결, 깨끗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계시)을 받는, 동기(動機)의 청결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처음 동기가 사실상 그리 순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께서 기대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깨끗한 동기로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정치적인 이유, 사회적인 욕구, 세속적인 욕구 등이 그 동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잘못된 동기들이 씻기어지고 청결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동기(動機)의 순수화가 이루어질 때, 그들은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구약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보십시오. 물리적으로는 분명히 출애굽 했으나, 사실은 애굽의 근성들, 우상숭배로 인한 타락한 심령, 병든 의식이 계속 문제가 되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도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즉 동기가 자기중심적이요, 육신적인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구제, 선행, 교회생활 전체가 깨끗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나 세속적 욕망 등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동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청결은 일편단심 혹은 두 가지 마음이 없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갈등이 무엇입니까? 두 마음 때문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참 곤하고 괴롭다) 사람이로다’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그 초점을 두고, 우리 식으로 하면, 그리스도적인 사고, 그리스도적인 삶의 존재양식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그리스도는 범죄함이 없고 그 영혼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마음이 청결해 질 수 있을까요?


 
마음 청결이란, 그냥 막연히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아지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동기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마음을 바꾸는 일이요, 즉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이요, 이것이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변화의 역사입니다.


자 그런데 이건, 자력(自力)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불가능(不可能)합니다.


여러분! 자기가 자기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생각만큼, 위험 한 것은 없습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오직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역사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은혜의 방편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들려지는 말씀과 몸으로 체험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시는데, 마음이 청결하기를 원하는 자는 말씀을 겸손히 받고, 성령의 감화하심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마음이 청결케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지는 방법은, 매일 매일 우리가 당하는 구체적인 사건(事件)들로 인해서입니다.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보십시오.
 
그들은 인생광야 40여년 동안, 모진 고난 속에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마지막 목표(final goal)가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 땅,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겪는 여러 가지 시련(징계)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에, 욥이 그 많은 고통을 겪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극복하고 나서, 그가 한 마지막 고백이 무엇입니까?

욥기 42장 5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그 볼 수 있는 눈은, 고난을 통하여 정결케 된 마음의 눈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시련과 환란과 고통과 핍박이 우리 신앙의 동기를 순수하게 만들 때가 참 많습니다. 즉 고통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마음을 청결케 합니다. 우리가 겪는 매일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하려고 하실 때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수단(은혜의 방편)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관점)이, 바꾸어지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의 복을 결코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시편 107편 9-12절을 같이 한번 찾아 보십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그 뒤에 시편 107편 17-20절에 17. 미련한 자는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앞에, 시편 105편 17-19절도 찾아 보십시다. (이 말씀은 요셉의 생애를 축약한 말씀인데,)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중죄인을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의 한 가지)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여러분!
매일 매일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알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말씀) 듣는 훈련들을 많이 했습니다. 왜 이런 훈련들을 해야 합니까? 이렇게 되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는 복이란 어떤 복입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福)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을 본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출애굽기 33장 20절에서도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또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되고, 그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8-9절에서 빌립이 그럽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그러셨지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 본다는 말은, ‘안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계시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세 가지 뜻으로 요약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①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그럽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아멘!


②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게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 1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리고 ③ 셋째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며,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5: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하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요한복음 15: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럽니다(20절, 23절, 21절)찾아보십시다.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음 청결은 결국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요 말씀과의 관계회복을 의미 합니다. 이럴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8절에서 그럽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말씀에 자기를 위임, 위탁 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께 드린다’ 라고 표현하고 또 ‘하나님께 순복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지는 것을 원하십니까? 그렇게 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참으로 더럽고, 간사하고, 추악하고, 탐욕스럽다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팔복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 하는 자는, 남을 긍휼히 여깁니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면,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여! 내가 저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처럼, 나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이나 주의 긍휼하심이 있어 내가 지금 살아갑니다. 나도 긍휼을 입었으니, 저에게도 긍휼을 베풀게 하소서!”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또 애통하는 자는, 마음이 청결되기를 소원합니다. 자신이 죄악으로 깊이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이 추악함에서, 정결케 되기를 소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
자기 심령이 참으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다시 말해 자기 의(義)에 사로잡혀 있으면, 남을 긍휼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자기 죄악에 애통함이 없는 자는 왜 자신의 마음이, 정결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릅니다.


여러분!
온유한 자만이, 화평케 할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만이, 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도,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이 복의 근원자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이유도,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8:16절에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이런 신령한 하늘의 복을 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자가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마음 청결의 비결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을 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복된 간증이 계속 풍성해 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린 언젠가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 가 섭니다. 그때를 위하여 지금 준비하는데, 그 준비가 마음의 청결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누구인가?   오직 자기 마음을 예수님에게 맡기고, 그가 홀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는 자이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청결하려면,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 말씀을 다 함께 읽고 묵상하십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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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0일 주일 설교말씀

2016/03/21

제목 :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의 의미말씀 : 베드로 전서 2:18-25설교 : 김원동 목사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