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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은혜의 말씀

제목
2016년 3월 20일 주일 설교말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3/21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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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의 의미
말씀 : 베드로 전서 2:18-25
설교 : 김원동 목사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미국에 ‘존 파이퍼’ 목사님이 (미네아폴리스, 베들레헴 교회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Jesus Christ)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이유로, 그토록 큰 고난을 받으셨는가?“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는 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는가? 즉 원인을 묻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당한 수난으로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베드로 전서 2:21절에) “......그리스도가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멕시코에 ‘라메사 교도소’가 있습니다. 이 교도소는 흉악 범죄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크리토’라는 의식(儀式)이 치루어 집니다. 예를 들면, 새로운 죄수들이 들어오면 50명의 교도관들이 총을 장전하고 양쪽으로 쭉 섭니다. 그런데 죄수들이 줄지어 선 50명의 교도관들에게 자기를 소개하게 합니다. 이름, 나이, 죄목, 형기를 50명의 교도관들에게 무려 오십 번이나 반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오십번’을 반복하고 나면 자신이 참으로 죄인이라는 자괴감(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감정)에 빠져, 절망과 고통을 느끼다가, 마지막 ‘오십 번째 가서는 괴성을 지르고 땅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완전히 지쳐버린다고 합니다. 그 때 한 수녀가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흉악한 죄수의 머리와 이마를 만지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도 당신처럼 죄수가 되었습니다. 이 빵과 포도주를 받으세요! 당신의 허물과 눈물과 아픔, 그리고 당신의 삶의 후회를 너무나 잘 아는 분의 살과 피입니다!” 수녀의 말씀과 함께, 빵과 포도주가 죄수들에게 전해질 때, 죄수들은 한없이 흐느끼며 통곡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왜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는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당시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고,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 핍박에 대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함으로, 이겨가도록 권면한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나치 독일의 잔학함을 폭로하는 책(Hiding Place)에 보면, ‘코리 붐’씨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은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건강상태를 조사 받는데, 완전히 발가벗겨 놓고, 줄지어 검사관 앞에 서도록 했습니다. 어느 날 여자들의 나체 행렬 속에서, 코리는, 그의 아내를 발견합니다. 그 때 코리는 그의 아내에게 다가가서 이런 말을 합니다. “베시!(아내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도 벌거벗으신 채 십자가를 지셨어!” 그렇게 위로할 때 그의 아내도 남편을 보고, “그래요! 나도 예수님처럼 따라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응답을 합니다. 나체 행렬 속에서 갖은 수치와 모욕, 그리고 절망의 고통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이 부부의 대화를 듣고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런 고난을 통해서 그 고통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신앙의 성숙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받으셨는지 그 고난의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을까요?
첫째. 고난에 대한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애매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즉 선택적인 고난입니다. 명분 있는 고난입니다. 목적 있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고난 받은 이유는?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고난은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당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먼저 그 본(本)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삶의 상황에서 말씀합니다. (베드로 전서 2:18절을 보십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여기서 말하는 ‘사환’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남의 밑에서 사환으로 일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환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의 권위를 존중해야 하며, 지속적으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에 대한 존중과 순종은, 주인의 인격의 좋고, 나쁨에 의해서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상황에서
첫째, 사환들은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즉 순순히 복종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 뿐 아닙니다.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아야 합니다.

(19절, 20절을 보십시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사환은 까다로운 주인에게 부당하게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 속에 ‘아름다우나’(헬라어, ‘카리스’(caris)라는 말은) ‘은혜’라는 뜻인데, 애매히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주간을 통해서, 이 부분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왜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가? 그리고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는 가운데 고난이 필연적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 교회사에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나, 선한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궁극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고통은 같은데 전혀 다른 두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즉 고통의 결과를 다르게 맺고 있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 사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빅터 E. 프랭클(Victor E. Frankel)이라는 분을 아시죠. 그는 나치 독일의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고, 다른 사람들도 고난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 속에서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저주이지만,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놀라운 축복일 수 있다.” 그러니까 고난의 의미를 아는 자에게는 고난은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고난당하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떻게 해야 고난을 면할 수 있는가? 고난을 피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실존적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말합니다. ‘오로지 고난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이 있고, 그리고 의를 위하여 스스로 선택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 고난을 선택하겠는가? 어떤 고난의 길을 가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런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고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다.”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당합니다. 왜 당하는지, 어째서 당하는지,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당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생각합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사랑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가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잘 아는 대로 억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말이 있죠, “악법(惡法)도 법이라”고! 악법에 의해 그는 처형이 되는데, 처형장에 나갈 때에 그의 제자들이 따라가면서,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선생님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돌아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이 사람들아! 내가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하겠느냐?”어차피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죄가 있어서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선택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한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 살도 되기 전에 고아(孤兒)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힘겨워서, 동생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장성한 뒤에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결혼한 지 13년 만에 아내와 사별(死別)하고 재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무려 스물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의 열 명이 열 살 전에 다 죽었습니다. 참 비참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 남은 자녀 가운데도 하나는 정신박약아입니다. 이 예술가는 노후에도 비참했습니다. 인생 말년에는 시력을 잃었고, 또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서 역경을 뚫고 끊임없이 불후의 명작을 썼습니다. 명곡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마다 그 첫머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쓰고, 작품마다 마무리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라고 썼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바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하의 곡을 듣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바하를 알지만, 그가 한평생 이렇게 모진 고생을 했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모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의미(意味)를 압니다. 고난의 결과(結果)도 압니다. 그러나 고난의 필요를 압니다. 그래서 그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배워갑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점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 주간에, 우리가 겪는 고난의 의미를 어떤 의미로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본문 베드로 전서 2:21-25절을 같이 읽으십시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기 보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어떻게요?


①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셨지만 (22절에)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습니다.
②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습니다. 고난 때문에 남을 속이려 하거나, 남의 인격을 비난하거나, 거짓되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③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대항할 힘이 없으면 대신 욕이라도 하잖아요! 마음에 앙심을 품고, 그 상대에게 자신이 당한 만큼 되갚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④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언젠가 두고 보자! 결코 위협하지도, 한(恨)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한(恨)을 품거나, 언젠가는 보복을 하리라!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런 고난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 스데반을 보세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복을 빕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난당하는 모습이요, 이 본(本)을 따라 갈 때에만, 그곳에 승리의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⑤(예수님은 고난당하실 때)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즉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공의에 위임을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⑥ (24절 보세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그곳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우리)는 나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 목적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계시입니다. 의의 계시요, 의의 승리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아주 puritan(청교도적인)마을인데, 술집도 없고, 청결하게 사는 것을, 자랑삼아 사는 엄격한 그런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처녀가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진 것입니다. 이 마을에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의 궂은일은 그 수도사가 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가 임신을 하고, “아이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거나, 자칫 잘못하면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추방을 당하게 되었는데, 추방당하기 직전에 이 여인이 하는 말이 “저 수도사가 아이 아버지”라고 고백을 했습니다.동네 사람들은 배신감 때문에 수도사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역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자 그런데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 사람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인 것입니다. 즉 남장여인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모든 사람이 다 숙연해 졌습니다. 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그녀가 대신 핍박과 고난을 받고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죄 없으신 자가 죄인을 대신해 죽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충족된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원리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제는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걸 가리켜, 의의 승리라고 합니다.

왜 우리더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십니까? 자기 십자가는, 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고통과 희생, 그리고 우리가 져야 할 짐을 의미합니다.


‘데이비스 리빙스턴’ 전기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기자 가운데  ‘H.M. 스탠리’라고 하는 기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1871년에 아프리카에 있는 리빙스턴을 취재하기 위해 찾아 갑니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이 ‘리빙스턴’에 대해서 두 가지 엇갈린 루머가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리빙스턴은 진정한 사역자다. 그를 통해 아프리카가 변하고 있다” 라는 이야기가 있었구요. 또 한편으로는, “리빙스턴은 사기꾼이다. 그는 많은 선교비를 가로챘다! 그런가 하면 지금 원주민들도 그의 지도를 받지 않고, 이탈하고 있다.“ 그런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상을 알기 위해 그 기자가 간 것입니다. 그는 무신론자(無神論者)였습니다. 그런데 3~4개월 이상 밀착취재를 하면서 리빙스턴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고,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다 같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취재를 끝낸 후, 4개월 만에 ‘스탠리’기자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이 리빙스턴에게 전도를 받았느냐?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안팎으로 무수한 오해를 받고, 심지어는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그를 배신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이런 모든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고난을 참고, 인내하며 생활하는 그를 나는 단지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생각하기를, ‘무엇이 저 사람을 이토록 인내하게 하는가?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용서하게 하는가? 사랑하게 하는가? 그것은 아마 그의 신앙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저 리빙스턴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보자’ 라는 그런 마음이 생겼을 뿐입니다!”


여러분!
베드로 전서 2:24-25절을 다시한번 읽으십시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러분!
이번 고난 주간에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이제 우리더러 그 자취를 따라오라 하십니다!

먼저,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 때문에, 죄를 범치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입에 거짓을 버리라! 하십니다. 남의 인격을 비난하거나, 거짓되이 말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대신 욕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위협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위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로 의롭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목자 되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 받으셨습니다. 사람을 얻기 위해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방향도 그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이 훈련들을 한번 해 보십시다.

“고난을 받을 때, 죄를 범치 말자! 입에 거짓을 버리자!
남의 인격을 비난하거나, 거짓되이 말하지 말자!
욕을 받아도 대신 욕하지 말자!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위임하자!
이렇게 함으로 우리로 의롭게 살고, 치유를 받도록 하자! 그리고 영혼의 목자 되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도록 하자!“


여러분!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이 삶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상칠언’을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어려운 시간에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다는 뜻으로, ‘가상칠언’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그 가상칠언 속에도 우선순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23:34) 라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옆에 매달려 있는 강도가 죽어가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 하소서” 그렇게 예수님께 부탁하는 말을 들으시고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강도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셋째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 그러시면서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상 세 마디의 말씀은 모두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먼저는,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다음에는 옆에서 죽어가는 강도를 용납하시고, 그리고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어머니와 제자들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를 쳐다보십니다.

네 번째 말씀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영적인 고통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지금 만인의 죄를 대신 지고, 죄인으로 취급받는 시간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듯한 영적인 아픔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는,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고 육적인 아픔을 호소하십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아픔이 먼저이고, 그리고 육적인 아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곱 번째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하는 임종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상의 ‘가상칠언’중에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목마르다!” 라는 말씀은, 얼마나 대조되는 말씀입니까? 여기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목적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해 태어났고, 십자가를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목적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승리요. 세상에 대한 승리요, 육신에 대한 승리요, 사탄에 대한 승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물량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향한 뜻, 이루셔야 할 복음사역에 대한 질적인 차원에서 ‘다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순서적으로 보면, 이 가상칠언에서도 먼저, 원수를 생각하시고, 또 옆에 있는 이웃을 보셨고, 다음에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순서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
이번 고난 주간동안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함께 동참해 가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이 일에 다 같이 참예하는 우리 하누리 권속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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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4

제목 :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말씀 : 마태복음 5:8설교 : 김원동 목사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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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3일 주일설교말씀

2016/03/14

제목 :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본문 : 마태복음 5:3-7,  야고보서 2:8-13설교 : 김원동 목사 <마태복음 5:3-7>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