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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은혜의 말씀

제목
2016년 3월 13일 주일설교말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3/14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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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본문 : 마태복음 5:3-7,  야고보서 2:8-13

설교 : 김원동 목사

 

<마태복음 5:3-7>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야고보서 2:8-13>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가 흔히들, 인간관계를 가질 때 “어떤 사람이 편안하고 좋아집니까?” 하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성이 좋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인간성이 좋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게서 따뜻한 인간미가 있다는 그런 의미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을 두고, ‘인간적이다’, 혹은 ‘비인간적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한 개인의 인간성’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 ‘인간성’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성품(性品), 즉 사랑과 이해와 용서 그리고 자비와 긍휼 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런 사랑과 이해,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질 때, 이것을 ‘인간적’이라고 그러고, 그러질 못하면, ‘비인간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깊은 배려를 해 주는 것은, 참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가족 간에 대화를 하면서, 서로 약점을 건드리고 계속 헐뜯으면 그거 참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의 예민한 열등감을 건드리지 않고, 자존심을 세워주고, 남편 역시 아내의 연약함을 따뜻하게 배려해 준다면 그 가정은 참 따뜻한 가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安息)할 수 있는 가정이란, 바로 이런 이해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있는 가정이요, 참 편안한 인간관계는, 이런 마음들이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야고보서 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差別)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범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矜恤)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최고의 법’(헬: 노몬 바실리콘)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즉 왕의 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 가운데 으뜸가는 법, 즉 왕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최고의 법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왕의 법, 으뜸가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양심의 법으로도 최고(最高)입니다. 도덕의 법으로도, 최고입니다. 세상 법으로도, 최고입니다. 그 어떤 법도, 사랑을 정죄하지는 못합니다. 사랑을 정죄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상,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자유(自由)할 수 없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면, 그 마음이 황폐해 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도, 구원도, 자유도, 평안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문제는, 법(法)은 있는데 관대함과 너그러움이 부족합니다. 의(義)는 있는데,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비판과 책망만으로는 사람을 바르게 세울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의와 사랑, 법과 관용, 이 둘이 온전하게 조화(調和)를 이룰 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에 '나과디아'라는 국제공항이 있습니다. 이 공항은 나과디아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그 분은 유명한 재판을 한 재판관이었습니다. 어느 날 홀아버지가 어린 아이 세 명의 자녀들이 굶는 안타까움에 그만 빵을 훔치다가, 빵집 주인에게 들켜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정을 다 들은 재판관은, 사정은 딱하지만, 훔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에 빵 값의 10배인 10불의 벌금을 내라고 판결(判決)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벌금을, 자신이 내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그러지요. "미국에 지도자들이 얼마나 지도를 못하면 빵을 훔치기까지 하겠는가. 빵을 훔치게 한 우리에게도 잘못한 것이기에 우리가 냅시다." 그리고 그 재판정의 방청객과 배심원들에게 모금함을 돌려 57불을 걷어, 그 돈을 그 아버지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 판사는 법(法)보다도, 관대함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후에 뉴욕 시장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나과디아라는 공항이름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신명기 14:2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凡事)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995년 MBC가 5대 도시에 재직하는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법조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누군가?”라는 질문에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46.2%)과 함께 김제 원평 출신의 김홍섭 판사를 꼽았습니다. 서울고등 법원장 재직시인 1965년 만 50세의 나이에 별세한 김판사가 지금까지 후배 법관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갖고 재판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판사였지만 사도 법관이라 불려졌습니다.그는 재판할 때, 피고인들에게 더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요. 그러나 내가 대한민국의 법관이 되었기에, 그대들에게 법을 선고(宣告)하니 이해해 주시오." 그는 법에 의해서 선고를 내리지만, 단상을 내려가서는 피고인들에게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죄인(罪人)이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 용서 받을 수 있소." 그는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그는 자기 월급의 많은 부분을 죄수들을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죄수들이 그에게 판결받는 것에 대하여 영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그가 남긴 수필집 「무상을 넘어서」(1960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최고의 법을 지키려면, 두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나는, 사람을 대할 때 외모(外貌)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긍휼(矜恤)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에 관한 이런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하루는 집무 중에 외출을 하려고 나서는데, 수위실 앞을 지나다가 서류 하나를 잊고 나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수위를 보고 부탁했습니다. “자네 올라가서, 내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좀 가져다 주겠는가?” 부탁을 받은 수위는 명령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서류를 가지고 내려와 보니, 대통령이 수위인 자신의 의자에 떡 앉아 있는 것입니다. 수위는 너무나 황송해서 “각하, 각하께서 그 자리에 앉아 계시면 어찌합니까?” 라고 했더니 링컨 대통령이 천연스럽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내 심부름을 하는데 내가 자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뭐가 이상한가?” 남이 나를 위해 일해 주는데, 나도 남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하는, 링컨의 마음이 드러나 있는 일화입니다.


 
여러분!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자리가 높아진 것이지, 사람이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대할 때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말씀으로는,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잠언 14:3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즉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여러분!
“긍휼을 행치 않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심판)하실 때 이 ‘긍휼(矜恤)’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긍휼에 대해서 보다 깊은 뜻을 생각해 보십시다.


긍휼이란 말은(헬: 엘레몬)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닌, 좀 특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문의 뜻대로 하면, ‘그 사람의 입장에 깊이 들어가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의 생각, 그의 입장에 서서 이해와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 즉 공감하는 것을,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그의 생각과 감정을 함께 경험하고, 느끼며, 이해하는 것이 긍휼인데 이것은 참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낮은 자리에 있는 그에게 불쌍하다고 동정하는 그런 감상적인 긍휼이 아니라, 내가 그의 처지와 형편으로 내려가서, 함께 체험하는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긍휼 중에 가장 큰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왜요?성육신 사건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문화 속에 오셔서 인간이 겪는 갖은 고통을 같이 체휼(sympathize)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주의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의 긍휼을 먼저 입은 자라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후해야 되고, 말도 후하고, 행위도 후해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으로 기억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첫째 긍휼이란, 그 사람의 입장에 들어가서 이해하고, 그와 함께 공감하는 것을 ‘긍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긍휼의 또 다른 의미로는, 용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입장에 서면, 용서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프랑스 격언에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해에는 용서가 따라옵니다. 성경의 비유 중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설명하고, 또 목자로도 설명합니다. 아버지로 설명하는 이유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무슨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목자(牧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양이 엇길로 가도 참아주고, 그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목자의 긍휼입니다.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 긍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긍휼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9:13절에)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시련이나 환란이나, 출세나 실패나, 건강이나 질병 등 모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을 가르쳐 주시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엄청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을 배운 스데반도 순교(殉敎)할 때 역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런 긍휼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비유를 보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당장 찍어 버려야 하는데, 그 과원지기가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주인이여! 1년만 참아주소서. 내가 다시 가꾸고 수고해서 열매 맺도록 하겠나이다....” 여기에 긍휼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 됨의 증거가 무엇일까요?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이 긍휼을 베풀어가는 데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긍휼히 여김을 받는 그 사람 속에, 감격과 사랑을 뜨겁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감격을 낳고, 감격은 인간은 새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감격을 경험하고서야 인간이 되고, 이 감격이 이어져야,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할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긍휼이야 말로,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하는 긍휼 속에 조건 없는 자비와 용서를 바라듯이, 우리가 행하는 긍휼(용서)에도,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 여러분
긍휼의 의미 속에 용서를 포함한다면, 그 용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너그러운 부모 아래 자란 사람은, 너그러움을 베풀 줄 압니다. 손님 대접 잘하는 집에서 자란 사람이 손님 대접을 잘 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버지의 그 긍휼하심을 입었다면 우리 역시도 그 긍휼을 베풀어 가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용서할 수(긍휼을 베풀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린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 죄인(罪人)임을 압니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 받았다면 그 은혜, 그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용서해야(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계속적으로 긍휼을 힘입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긍휼을 우린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거절을 당하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이,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낫을 빌려주라” 그랬습니다. 이때에 아들이 항의를 합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우리에게 낫을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빌려주어야 합니까?”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지혜로운 대답을 합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하면, 이것은 복수다. 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과 달리 빌려 주겠다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멸시요, 증오다. 그러나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긍휼은 복수가 아닙니다. 증오가 아닙니다.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성품이 되고, 인격이 되어서 그 마음 그대로,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그런 마음, 이것이 긍휼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어느 겨울에 말을 타고 가는데 벌판에 웬 사람이 서서, 오돌 오돌 떨고 있었습니다. 말에서 내려서 “무얼 도와 드릴까요?” 그랬더니 “제가 추워요.” 합니다. 그래서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혀 주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벌벌 떨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프랜시스는 그 사람이 문둥병 환자인 것을 알면서도 자기 몸의 체온으로 그 사람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그를 꼭 끌어 안았습니다. 그러자, “아 이제 따뜻합니다.” 하더니, 품에 안겼던 그 분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오는데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만나 뵌 것입니다. 그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그가 이런 체험을 한 후, 그 많은 재산과 명예, 직위, 그 모든 것들을 다 뒤로하고,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장 많이 실천하는 성 프랜시스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이 있습니다. 어떤 복일까요?
첫째, 내적으로 임하는 복(福)이 있습니다.


잠언 11: 17절에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도 해롭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긍휼을 베푸는 자는, 언제나 그 마음에 평강(平康)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악하게 하는 사람은 우선, 자기의 영혼이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긍휼’을 베푸는 훈련(訓練)을 해야 합니다. 마음도 후하고, 말도 후하고, 행위도 후해서,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 우리의 마음들이 평안하고, 넉넉한 마음을 갖는 훈련을 하면 참 좋겠습니다.이것이 자신의 영혼(靈魂)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긍휼을 되돌려 받는 복이 있습니다.나는 동쪽에서 A라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었는데, 하나님은 서쪽에서 B라는 사람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십니다.그뿐 아닙니다.

셋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이 친히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잠언 14:21절에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긍휼을 많이 베푸는 자는, 언젠가 그 긍휼을 되돌려 받습니다.


레위기 19: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圖謀)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디모데후서 1:16-18절에 이런 기도가 나오지요? 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우리가 이웃에게 부지런히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우리는 긍휼함을 베풀고, 긍휼을 빌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죄인도 우리의 입에서 비판, 정죄하지 말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훈련(訓練)을 하십시다.


여러분!
우리의 말에 흔히 하는 큰 실수가 무엇이냐 하면, 아이가 실수를 했을 때“너는 하는 것이 항상 왜 이 모양이냐!”고 합니다. 그 아이는 실수였는데, 말하는 사람은 “항상(always) 그렇다.” 본래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의 잘못에 대해서도, “너는 본래가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랍니다.‘언젠가 그 사람(아이)의 실수가, 내게도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풀어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그럴 때, 혹 내가 이웃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데 인색한 일이 없었는지 그것을 점검(點檢)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 3대 임금 태종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을 석방하고, 기우제를 정성껏 드렸는데도, 비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왕이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궁녀들에게 미쳤습니다. 수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이 어쩌다 궁으로 들어와 그 아리따운 청춘을 고스란히 희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는 시집가서, 자녀를 낳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궁녀들에게 혼수감까지 후하게 주어 사가(私家)로 보내 출가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자 마침내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려면, 긍휼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결단코 회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웃에게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까? 내 형제, 자매에 대해서, 할 수 있으면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훈련들을 해 보십시다. 그 때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하신 ‘복’들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랑과 긍휼 뿐입니다. 우리를 마지막까지 승리케 하는 것은 ‘긍휼의 마음’뿐임을 명심(銘心)하십시다.
야고보서 2: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또, 시편 85편:10절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라고 했습니다. 긍휼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최후까지 남는 것은, 긍휼의 마음뿐입니다. 긍휼만이 심판을 이깁니다. 그렇다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리라! 결단해야 합니다. 긍휼을 베푸는 그 자에게는, 늘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질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福)을 받습니다.



여러분!
긍휼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처해 있는 처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 훈련은 누구나 다 해야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 그는 샌 앤드류에 사는 툴록이라는 백작의 부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夫君)이었던 알버트 공이 세상을 떠나자, 여왕도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안되어서, 그 툴록이라는 백작도 세상을 떠나,
빅토리아 여왕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그 부인도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 툴록 백작부인이 남편이 죽어, 깊이 상심하며 절망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빅토리아 여왕은 어느 날 밤 소식도 없이 시종 몇을 거느리고는 갑자기 그녀의 집을 찾아 갔습니다. 놀라서 뛰어 나와 땅 바닥에 엎드리는 툴록 부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여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어나시오. 나는 오늘 밤, 여왕으로 이 집에 온 것이 아니라, 남편 잃은 한 불쌍한 과부의 몸으로, 남편 잃어 상심하는 친구를 위로하러 왔을 뿐이오.”



여러분!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까?


한번 더 묻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까? 아멘!
그렇다면 긍휼히 여기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그 자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훈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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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6일 주일설교말씀

2016/03/08

제목: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본문: 마태복음 5:3-6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