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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은혜의 말씀

제목
2016년 3월 6일 주일설교말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3/08

제목: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본문: 마태복음 5:3-6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 유명한 수학자요, 철학자요 종교가였던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2경~497)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하고 할 때, 그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가르쳐 주는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생을 사는 지혜와 자세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데,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각자 인생의 내용과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관(人生觀)’이라고 할 때 관(觀)자는 ‘볼 관’자입니다. ‘사물을 보되, 깊이 보는 것을 관(觀)’이라고 합니다. 즉,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가 가치관(價値觀)이요,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가 역사관(歷史觀)인데, ‘관(觀)’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인생관(人生觀)’일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의 질이 결정(決定)되어 질 것입니다. 바른 인생관을 가지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인생관을 가지면, 불행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바르게 살고 싶지요?” 인생을 바르게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학문을, 우리는 철학(哲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올바른 인생관을 탐구(探究)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하여 내 인생을 바쳐야 하는가? 삶의 의미(意味)가 무엇이고, 생의 목적(目的)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것이요, 의미 있게 사는 것인지...... 이런 문제들을 탐구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인생을 바르게 사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본문에서,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온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복 있는 자가 되려면, 첫째, 자기 실재(實在)를 압니다.
① I am nothing(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② I have nothing(나는 참 무능력한 사람이구나)
③ I can do nothing(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라고      하는, 자기 실존을 깨달아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죄(罪)의 실체를 바로 압니다. 이 죄(罪)의 실존(實存) 앞에서, ‘죄악된 자기 모습’을 보고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 비로소 온유한 자가 됩니다. 타인을 보는 내 마음이 달라집니다. 겸손해 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까? 도대체 ‘의(義)’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까? ‘의’라고 하는 말은, ‘옳을 의(義)’, 즉 바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의는 의인데, 이것은 사람의 의가 아닙니다. 이 의는, 하나님의 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의의 주인은 하나님이요, 의의 표준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義)’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關係)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연합(聯合)해야 합니다.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지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신앙관’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보고자 할 때, 가장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갈등이 뭐였습니까? 아마 롬 7장에 기록된 말씀일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갈망!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갈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罪)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分離)시킵니다. 즉 모든 갈등(불행)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기를 소원하는 갈망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대한 갈망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은 갈망이요, 동시에 죄의 법에서 자유하고 싶은 갈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러 훈련들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 훈련을 하면 할수록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행(行)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내가 원하는 바 선(善)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惡)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 죄의 법에서 자유함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그 자유함을 누리고 싶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쾌락’을 쫒아가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즉 권력이나 명예욕이나 향락을 추구하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행동은, 인간의 본능(本能)입니다. 원래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한 기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쾌락은, 감성적으로 만족한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쾌락을 추구할까요? 왜 향락을 추구할까요? 
이제는 더 이상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감성적으로, 고통받는 상태에서 살고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권력의 욕심이 많은 사람은 심리적으로 보면, ‘남보다 우월하고 싶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권력이란 남을 복종시키고 지배하려는 힘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이 왜 권력을 강하게 추구하느냐? 하면, 권력에는 명예가 따르고, 영광이 따르고 우월감과 남을 지배하는 쾌감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명예에 욕심을 가지게 됩니까?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고, 자기를 나타내고,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기 존재가치감과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자기 현시적인 강한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니까 왜 사람들이 그런 욕망들을 그렇게 추구하며 살려고 합니까? 왜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서 남을 지배하려고 합니까? 왜 자기를, 그렇게 드러내려고 합니까?  왜 쾌락을 쫒아갑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삶의 철학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함이다! 자신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데 스스로 버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목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곧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한마디로 언급하면 그리스도의 삶의 존재방식이요, 그 방식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남을 지배하고, 남을 다스리고, 남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법은 섬기라고 합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종의 자리에 서서, 섬기는 훈련을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좌절된 그 욕구가, 오히려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생명의 법에서 자유(自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법, 의의 법대로 하면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의(義)’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구원의 근거요, 생명이요, 우리에게 계시하신 복된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문제를 구원의 문제로 보았잖아요. 그런데 구원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계시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상황 상황에서 무얼 원하시고 계시는가?” 그 하나님의 마음의 계시가, 곧 ‘의’입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속에 어떤 사람에 대한 시기가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시기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자신이 바라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욕구불만의 결과로 옵니다. 그러니까 시기심이 강한 사람은, 여러 가지 행동을 통해서 이 감정을 나타내는데 그 대상에게 욕을 하거나, 비난을 하는 등, 여러 방법을 씁니다.시기나 질투나 탐욕은 서로 연관되는 죄악인데, 자신의 위치와 소유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할 때 이런 감정이 일어납니다.그렇다면 우리 안에 시기나 질투가 일어난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도달하지 못한 목표(욕구)를 채우는데
-내 방법으로 하느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느냐? 그것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 알고 깨달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 ‘복된 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우리가 진정 자유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자유는, 소유(所有)에 있지 않습니다.
자유는, 스스로 자기를 내어 주는데 있습니다. 이 원리를 깨닫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인간의 참 행복은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받으면, 준 사람에게 종속(從屬)됩니다. 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 하니까그 사람에게 매여서 갈등을 겪잖아요! 받으려고 하는 마음은, 언제나 원망으로 바꾸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주는데 자유함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심령이 될 때에 삶의 의미와 자기 존재가치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는 자가 자유하고, 주는 자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뭔가를 주고 싶은데, ‘내가 줄게 없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 사람을 돕고 싶은데, 도울 게 없습니다. 이것 참 안타깝습니다. 또,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 또한 참 슬픈 일입니다.
“당신의 역할은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만히 계셔요!” 이렇게 되면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일까요?
평생을 통해서 헌신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대상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그 사람은 참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섬긴다는 것이, 자기를 내어준다는 것이 이렇게 복(福)인데, 왜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자꾸 무얼 바라고 요구합니까?  타인이 내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기를 바랄 필요가 있습니까? 내 존재가치는, 하나님의 부르심(召命)에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사명(使命)’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라고 하는 목적(目的)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택은 곧 사명(使命)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사명의 ‘사(使)’자가, 심부름 시킬 ‘사’자입니다. 그래서 ‘사명’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①하나는, 심부름을 보낸 자입니다.
②또 하나는, 심부름을 받은 사람과,
③나머지 하나는, 심부름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위하여’ 살아야 할 내용(內容)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이것을 가리켜 ‘사명적인 자아확립(또는, 사명자로서의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부르시고,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부르실 때, 예를 들면, 섬기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섬기는 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때부터 비로소 자기 사명(使命)을 제대로 자각(自覺)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쓰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내가 쓰임을 받고 있다’는 이런 인식과 함께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만족감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는 그리스도인은 영적 충족감을 누려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라고 했는데, ‘주리고 목마름’ 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그 의가 내게 참으로 필요하다’ 라고 하는 필요성(必要性)에 대한 자각인 것입니다.

상담을 해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다 이 과정(過程)을 거칩니다. 자기 의(자기 방법)를 포기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義)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육체적인 욕구에 비유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팔레스타인 근방은, 굶주림이 많았습니다. 흉년이 자주 들고, 사막이라 먹는 것이 귀했습니다. 물은, 사막에서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어떤 기록에 보면, ‘낙타를 타고 가던 여행자가 사막에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목은 마르고 견딜 수가 없어서 타고 가던 낙타를 죽여, 낙타 속에 있는 물을 마십니다. 이 말은 곧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목마름이라고 하는 것은, 견디기가 참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그 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강한 자각이요, 인식인 것입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 자가 복이 있다는 겁니다. 그 복은, 본문에서 ‘배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의를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6:37)에서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아멘!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의(義)’를 주셔서, ‘칭의’ 즉 의롭다고 해 놓으시고 사랑하십니다. 즉 ‘의의 예복’을 입혀놓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누구의 의(義) 입니까? 하나님의 의입니다. 내 의가 아닙니다. 그의 의(義)를 구하는 자에게는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무얼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진정 갈함이 아닙니다. 누리게 하는 복이요, 배부름의 복입니다.


이사야 45: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찾아 보십시다.)
8.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이 말은, ‘의(義)’를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려 땅에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땅에 임하게 해서 신자들의 삶속에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46:12-13절에서는
12.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13.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물론 이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말입니다마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풍성한 ‘구원의 복(즉 배부름)’을 더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지난 날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 속에 여러 가지 갈등들이 있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잘못된 우리의 문제사고가 통찰이 되면, 우린 어떻게 행동해 왔습니까?  이 의(義)를 얼마나 목말라 하셨습니까?  주님의 의를 받아들이기까지는 결코 자유함이 없습니다. 주리고 목마름은 채워질 때까지, 그 고통은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를 사모하는 그 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도, 주님의 의를 사모하게 되면,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배부를 것이라!”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
그 자에게는 복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크게 채움을 받는 배부름이 있을 것이라”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이 배부름을 찾으십시다! 그리스도의 법으로 이 배부름을 찾으십시다! 세상의 어떤 법으로도 진정한 배부름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사역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원리, 이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고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깊은 자기 인식(認識)이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 실체를 보게 합니다. 사역자는 죄의 실존(實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I am nothing),
-나는 참으로 무능력한 자구나!(I have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구나!(I can do nothing), 이런 과정을 다 겪습니다.
그리고 둘째, 이 죄의 존재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罪人)인가를 애통하게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셋째, 하나님과 타인 앞에 온유한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법,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려면, 그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의(능력)가 필요해서, 그 의를 사모 할 때까지, 주리고 목말라서 그것을 얻기까지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려면 반드시 전제가 되는 것은, 사건(상황)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인식의 틀’ 즉 ‘성경적 세계관’에 관한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크 얼스’라고 하는 사람이 ‘허드(Herd)'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이 사람은 마케팅 전략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공동체 지향적이다!”라는 말을 해요. 즉 인간은 ‘함께 있고 싶어 하며, 함께 할 때에 더욱 안정감을 누리며, 행복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서로 상호작용해서, 함께 더불어 나아갈 때에야 행복하지만, 혼자서 이기적인 삶을 살면 우울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공동체를 지향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그 공동체를 지향하는 삶을 살고자 하면 많은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뜻을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교회 공동체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서로, 함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세워가라!’ 교회 공동체가 세워져야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 어차피 관계 중심적이기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갈등이, 관계(關係)에 대한 갈등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습니까?  분노를 품기는 쉽습니다. 분노를 품을 수 있는 명분을 갖기는 쉽습니다. 그 상대의 인격을 정죄하기는 쉽습니다. 그 상대의 허물을 찾아내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상대의 인격이나 그 상대의 행동이나 기타 그 밖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계명)앞에서 그러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우리는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알고, 그 지식은 있으나, 내 속에 ‘그를 사랑할 만한 능력(의의 능력)이 없는 것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 입니까? 저희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배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라는 계명 앞에서 굴복하고, 그를 용납하고, 그를 위로하며, 서로 세워가는 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복된 삶을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영적 배부름을 경험하며 약속된 복을 누려가는 자들입니다.

‘닉 부이치치’라는 사람이 한국에 왔었지요? 그는 1982년 호주에서 팔 다리 전체가 없이 몸통에 바로 발가락 두 개만 있는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특정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테트라 아멜리아 증후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이 출생 직후 숨지지만, 그는 살아 남았습니다. ‘운명을 원망하고, 삶을 향해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강연 내내, ‘자신의 삶의 의미와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헸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조건(條件)도, 하나님의 큰 섭리를 알게 되면, 소망이 된다‘는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 역시도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 앞에 나가 질문하여, 자기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그의 인생이 바뀐 겁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의지하는 믿음의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겁니다. 겹겹이 둘러싸인 불행의 조건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가면’ 행복한 삶이 된다는 것을, 그가 간증할 때에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눈물을 흘린 겁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구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福)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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