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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은혜의 말씀

제목
2016년 2월 21일 주일 설교말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2/22
첨부파일
Matthew-5-4.png

제목 : 애통하는 자의 복
말씀 : 마5:3-12
설교 : 김원동 목사


네덜란드 5대 여왕으로 ‘율리아나 여왕’이 있었습니다. 여왕으로 있으면서 후진국의 빈곤과 아동복지 문제를 해소하는데 앞장섬으로 세계 많은 나라의 귀감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1953년에 네덜란드에 큰 폭풍이 강타해 전국이 쑥대밭이 되었을 때,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호에 앞장서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네덜란드 국민은 ‘율리아나 여왕’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율리아나 여왕’의 생일인 4월 30일을 여왕의 날로 정해 지금도 큰 축제를 즐긴다고 합니다. 이렇듯 한 나라의 여왕으로서 추앙 받는 삶을 살았으나, 한 여성으로서 ‘율리아나’의 일생은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남편과 자식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많이 해야만 했습니다. 남편 ‘베른 하르트’공은 바람기로 유명했습니다. 미국 록히드 마린사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 등으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또 그녀가 임신 중에 앓았던 풍진 때문에 막내 ‘크리스티나’ 공주는 거의 시력을 잃은 채 살아야 함으로 평생 여왕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습니다. 또 둘째 ‘이레너’공주가 부모 몰래 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 국민의 원성을 듣기도 했습니다.어떤 미혼여성에게 이렇게 물어본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앞으로 가장 원하는 것 다섯 가지를 든다면 무얼 원하시겠습니까?” 했더니, “좋은 배우자가 있으면 좋겠고, 직장도 좋으면 더욱 좋겠고, 건강도 있어야겠고, 재능(능력)도 있어야겠고, 좋은 자녀를 두었으면 좋겠다”는 순으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젊은 미혼여성처럼, 자기가 가지기를 원하는 것 곧 이런 것들을 소유하면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 될까요?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에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에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부한 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웃는 자가 아니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은 모든 근심 걱정 잊어버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낙천적이고 즐길 수 있는 쪽으로 나아가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애통하는 자,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지를 살펴보십시다.



본문의 ‘애통하는 자’는 헬라어로 ‘펜순테스’인데, 원문의 뜻은 ‘모든 슬픔 중에서 가장 강한 고통스러운 슬픔’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었거나, 또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큰 배신을 당했을 때 가슴이 찢어지고 숨이 막히며, 온 마음과 몸이 떨리며 뼈가 쑤시며 고통을 느끼는 그런 슬픔을 말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설명합니다. 창세기37:34절에 보면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서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토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는데.... ” 심지어는 자신도 아들을 따라 죽겠다는 그런 고백을 하며 통곡 합니다.이것이 ‘애통하는 모습’입니다. 가장 큰 고통이며, 슬픔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렇게 애통하는 그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저희가 위로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겪는 슬픔이 많은데 그 슬픔을 몇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보십시다.먼저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 슬픔이 있습니다. 살면서 실패의 괴로움을 안고 슬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또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했기 때문에 고통과 큰 슬픔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고통 속에서 울고 애통하며 괴로워하면서 비로소 인생의 깊은 면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이 즐겁고 기쁠 때 인생의 깊이를 생각하지 못하다가, 깊은 고독에서 오는 뼈아픈 슬픔을 겪을 때 비로소 우리의 우리 됨을 찾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통하게 될 때에 자기의 자기됨을 깨닫게 되고 순수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되찾고 돌아가는 참 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평소에는 피상적인 생각을 하다가 오히려 애통하는 상황이 오면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모호한 존재로 살아가다가 모처럼 진실을 찾고 자신의 실재를 깊이 생각하는 때는 언제나 애통하는 때입니다.



여러분!
다윗을 기억하십니까?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니다.”(시42:1) 다윗이 진정 다윗 되는 순간이 바로 이런 애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애통 그 자체는 많은 것을 잃고, 지금까지 자기를 지탱시켜왔던 그 가치가 무너지는 큰 고통의 순간이지만, 바로 이 순간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참 귀하고 소중한 것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런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얻게 됩니다. 재물이 있을 때는 자신을 보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잃게 되면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기의 자기됨을 생각하고 자기 본연의 삶에 대해서 비로소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겸손해지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애통하는 자가 얻을 수 있는 보화가 많습니다. 이렇게 애통함이 나에게 진정한 겸손을 배우게 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애통할 때 참으로 사랑하는 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웃을 때 나를 찾아주는 사람과 내가 애통할 때 나를 만나주는 사람은 다릅니다. 누가 나를 참으로 사랑하는지는 슬퍼하는 그 시간에 알게 됩니다. 내가 즐거워 할 때는 내 자신도 친구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애통할 때 나의 애통을 이해하고 내 슬픔에 동참해 주는 친구를 필요로 하고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을 비로소 열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깊은 사랑의 교제를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애통할 때 우리는 자기를 발견하고 이웃을 발견하고 또 더욱 감사한 것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개  처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에게서 이런 말씀을 종종 듣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애통하는 자’ 되게 하셔서 하나님을 찾게 하고 발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를 때에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사랑하셔서 나로 하여금 애통하는 자 되게 하셔서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를 부른 것입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의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전에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왕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지만 그가 삶의 위기 앞에서 애통할 때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더욱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애통하는 자가 얻게 되는 깨우침이 참 많습니다.



‘괴테’가 이런 말을 했지요?
“눈물로 밤을 새워 본적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마라” 일반적으로 울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의 지혜를 모르다가 애통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말틴 루터’는 대학시절 친구와 함께 길을 걸어가다가 천둥 번개에 옆에 있던 친구가 죽게 됩니다. 친구의 시신을 안고 밤을 새워 통곡하다가 “도대체 산다는 게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살 것인가?” 인간 본연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결국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를 기억하시죠?
이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 배경을 보면 극도의 좌절과 슬픔가운데 있었을 때입니다. 이사야6:1절에 보면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왕의 통치 40년 동안 웃시야 왕의 큰 총애를 받던 관변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의 배경과 힘이 되었던 그 웃시야 왕의 죽음은 이사야로서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들어가 울며 기도합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슬픔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습니다. 애통함이 때로는 인간의 인간됨을 되찾게 하고 인생을 깊이 있게 하고, 자기를 찾게 하고, 사람을 얻게 하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애통’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애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의 애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5:3절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인식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인식하는 자는 그다음 애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기도라는 방법과 수단으로 성령 충만을  받습니까?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누리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의 애통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울을 기억하십니까? 로마서 7장에 보면 바울의 절박한 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19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 상)”

바울에게는 먼저 심각한 죄에 대한 자각이 있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떠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곧 애통하는 심령으로 연결됩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러분!
영의 사람은 모두 이 로마서 7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이 사망의 법’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 안에서 시기가 일어납니까?
왜 우리 안에서 악한 생각이 떠나가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나는 이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가?
나는 싫은데 이런 죄악 된 모습을 발견하고 이것 때문에 애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애통하는 그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악 된 상태를 인식하고 애통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하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애통은 회개의 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막연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말씀)에 대한 바른 응답이요 바른 관계회복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궤도 수정이요 자기 부정이요, 자기 십자가 즉 자아(자기 옛사람)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대개 큰 고통이 따라옵니다. 즉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기 의가 부인되어지는 아픔은 참 큰 것입니다. 깨어지고 부숴지고 찢기워지는 그 아픈 고통의 순간들이 반드시 있게 됩니다. 거짓된 나, 교만한 나, 이 ‘나’라고 하는 존재는 부인되고 죽어야 합니다. 여기에 애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리처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최초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의 깊이와 은혜의 높이는 정 반비례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한 회개는 결코 순간적인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일생을 두고 그가 겪는 사건 사건마다 그는 평생을 회개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그는 아무 원망 없이 피난을 갔습니다. 그 이유는 아들과 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회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직선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는 한 번도 밧세바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는 자기 자신을 꾸짖고 깨뜨리는 아픈 눈물입니다. 참 회개는 누구도 원망하지 아니하며, 어떤 환경이나 나로 범죄하게한 어떤 여건에도 핑계치 않고 “내가 스스로 하나님께 범죄했나이다.” 라고 하는 직선적인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애통함은 자발적이고 의식있는 행동입니다. 이런 회개의 눈물, 그 애통함이 있을 때 그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후회하는 것과 회개는 다른 것입니다. 뉘우친다고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부르심(말씀)에 대해 구체적인 바른 응답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배운대로 하면 성경적인 사고, 성경적인 행위입니다. 이렇게 될 때, “저희가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위로라는 말의 원뜻은 ‘파라카레오’인데 ‘곁으로 부른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 내주하심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애통하는 자의 복은 저희가 위로를  받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슬픔에서 슬픔으로 끝난다면 이것이 무슨 복입니까? 애통하는 자의 복은 위로 받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애통하고 스스로 위로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애통할 때 하나님이 그를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 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넘치게 해서 이 모든 고난 등을 견디게 하는 힘을 줍니다.
고후1:3-6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둘째, 위로를 받게 되면 평안이 임합니다. 평안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고후13: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 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위로자입니다. 보혜사 성령 그 분만이 우리의 인도자요 위로자입니다. 하나님의 그 위로하심은 애통하는 자만이 받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향한 애통함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향한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눈물의 선지자가 있었지요, 예레미아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운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아 4:19절 이하에 보면, 죄로 사무친 세상을 바라보면서 슬퍼하고 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조만간 멸망될 죄악의 도성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 뭔가 해야 합니다. 신앙은 이 세상적인 것을 더 많이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을 바라보면서 그치지 않는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롬9:2)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현세적인 향락과 세속적인 즐거움에 취해서 죄를 죄인줄 모르고, 그 죄로 인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하는 자는 흑암 속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의 슬픔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을 가진 자는 사랑하는 형제와 친족들이 그 흑암의 세력에 매여 있게 되면 자연히 마음에 고통과 눌림을 받게 됩니다. 이런 애통함이 있는 자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세상에 대해 애통함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인생을 이 사회인류를 위해 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우린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런 각오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삶의 영역에, 헌신하고자 하는 영역에  하나님의 크신 위로를 누려갈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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